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 가우디 (문단 편집) == 생애 == 1852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캄 데 [[타라고나]](Camp de Tarragona) 바시 캄(Baix Camp)의 레우스(Reus) 혹은 리우돔스(Riudoms)라는 마을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우디의 아버지 프란세스크 가우디 이 세라(Francesc Gaudí i Serra, 1813–1906)와 어머니 안토니아 코르네트 이 베르트란(Antònia Cornet i Bertran, 1819–1876)은 주물 장인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프랑스]]계 가우디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코르네트 가문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판 장인이었는데, 가우디는 아버지가 구리냄비를 만드는 과정을 줄곧 지켜봐왔다고 한다.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난 뒤 바로 귀가하지 않고 아버지의 작업장에 죽치며 질리지도 않는지 하루 종일 구경했다고 한다.] 전기에 따르면 애늙은이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어렸을 적부터 [[류머티즘 질환|류마티스]]를 앓아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서있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또한 고향 근처의 옛 유적을 복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꿈은 그의 사후 함께 복원을 꿈꾸었던 친구인 토다가 이뤄낸다.[* 에두아르트 토다 이 궬(Eduard Toda i Güell, 1855–1941), 조제프 리베라 이 산스(Josep Ribera i Sans, 1852–1912), 가우디 이 세 동기는 현재는 세계 문화유산이지만 당시 황폐해져 있던 포블레트 [[수도원]]을 보곤 소년시절부터 복구 도안을 그렸다고 한다. 그 도안은 가우디가 17세에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토다가 그린 것이란 말도 있다. 여담으로 이 셋은 학창시절 '엘 [[할리퀸|아를레킨]](El Arlequín)'이라는 기관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1살 위인 둘째 형 프란세스크[* 워낙 늠름하고 명석했던지라 부모의 기대가 굉장히 컸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와의 관계가 각별했는데 건장했던 그가 몸이 약했던 가우디를 많이 업고 다녔다고 한다. 훗날 이 프란세스크의 존재와 그의 이른 죽음이 가우디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적도 좋지 못하고 몸도 허약했던 가우디는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자신의 그림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게 그가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25세에 건축사 자격을 딴 후[* 가우디가 건축학교를 졸업할 당시, 학장은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바보에게 주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오직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학장이 이런 말을 남긴 이유는, 가우디가 예전에 한번 그의 건축물을 비난해서 가우디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번은 그를 낙제시켰으나 가우디의 재능을 알아본 한 교수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고 가우디가 그것을 완성시켜서 마지못해 졸업장을 준 것이다.] 시청 산하의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 받으면서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다. 본격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가면서 수입도 늘게 되고 허약했던 몸도 많이 건강해졌다는데, 혈기왕성한 청춘의 시기였다 보니 밤이면 밤마다 거리를 누비며 놀러다녔다고. 대신 술은 약해서 주로 미식을 즐겼다. 예술가들이 모이는 카페의 단골이었는데, 본인이 좋아서 가는 것도 있었겠지만 이제 막 활동하던 시점이라 인맥을 넓혀 좀 더 큰일을 맡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다.[* 스페인은 광장 문화에다 야행성이기에 나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겨울을 제외하고 낮에는 고온건조한 날씨 때문에 다니기 힘들다. [[시에스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1878년 카사 비센스[* 타일을 베이스로 한 아랍식 저택으로 사적인 건물이라 출입불가였으나, 바르셀로나시에서 일부를 매입하여 2017년부터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를 건축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가우디는 낭비 전문 건축가라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당시에 타일이란 꽤나 고가였는데 가우디는 당시 건축주가 타일공장을 경영해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왜곡되어 소문으로 퍼진 듯.] 그 후 카탈루냐의 명문가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면서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83년에는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으며[* 바로 이 해부터 가우디는 성가정 대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당 건립을 진행하고 있던 [[교구]]에서 원래 고용했던 건축가를 가우디로 교체한 것.] 이 시점부터 '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핀카구엘. 가우디의 후원자인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에게 처음 의뢰받았던 일로 구엘 백작이 가족과 주말을 보내기 위해 지은 별장이라고 한다. 지금은 북쪽 문주변만이 남았다. 문을 장식하는 주철로 만들어진 큰 용이 꽤나 인상적인 작품.] 이것은 아메리카와 직물산업을 기반으로 한 구엘 가문의 무제한에 가까운 후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 와중에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꼭 그렇다고 보긴 어렵지만, 언론에서 가장 자주 언급한 건축가인 것은 분명했다.] 건축가답게 다양한 수주가 들어왔으며 구엘 가문과 관련된 작품들 외에도 다양한 건설작업을 하게 된다.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 특이하게 돌을 쌓아올린 다음 깎아서 곡선 형태로 지은 건물. 그의 후기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두 작품 모두 좋아한다고 한다. 두 곳 다 고급아파트로 이용되었다.]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1883년부터는 평생 동안 설계한 '성가정[* [[예수]], [[성모 마리아]], [[나자렛의 성 요셉]]]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이런저런 재정문제 등으로 완공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우디 본인도 성당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완성되리라곤 장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슬프게도 나는 내 손으로 이 성당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후손들이, 다음 건축가가 이 건축물을 완성시키고 이곳에 빛을 내려주리라"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고 한다.[* 원래 구엘이 후원하다가 아들의 사업을 돕기도 해야 하고 너무 돈도 많이 들어가 중간에 빠졌다. 워낙 거대한 규모의 설계를 하였다는 게 문제겠지만, 성가정 대성당이 속한 [[교구]]가 유지되려면 일정 규모의 거대한 성당은 반드시 필요했다. 전혀 터무니없이 무리한 규모로 설계,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성가정 성당은 '''착공 당시부터 공사기간을 200년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속죄 교회로서 후원금으로만 지어질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카탈루냐 법원 인근의 대로를 건너다 [[노면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다. 전차의 운전사는 가우디를 지저분한 [[노숙자]]로 여겨 그냥 길가에 끌어다 놓은 뒤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고를 목격한 행인들이 가우디를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으나, 볼품없는 차림새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3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한 끝에 경찰관의 도움을 받아 4번째 택시 운전사가 겨우 운전하여 산 파우 병원(Hospital de Sant Pau)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도 그를 노숙자로 여긴 의사가 크게 다친 그에게 기본적인 치료만 해 주었다. 이후 가우디와 친분이 있던 주임 신부 모센 길 파레스(Mosén Gil Parés, 1880~1936)가 사고 소식을 듣고 가우디를 찾아 병원에 방문하였는데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그를 알아보고선 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닦달한다. 하지만 이 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 물론 가우디는 파레스가 그를 보았을 때 이미 치료를 받아 회생하기에는 너무 늦었으며, 그가 한 발언도 확실한 것은 아니고 썰이라고는 하지만, 이 사람의 성격상 충분히 이렇게 말하고도 남았을 법도 하다.]며 치료를 거부한 후 그대로 남았고, 결국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그를 죽게 만든 [[뺑소니|노면 전차 운전사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거부한 택시기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기사 3명과 그의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은 [[징벌적 손해배상|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2일]] 사실상 반(半)[[국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가정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uneral_Gaud%C3%AD.jpg|width=100%]] || || 장례식, 1926년 6월 12일 || || [[파일:external/www.fotothing.com/d6e0cd82c505fb90fb4a046155b22439.jpg|width=100%]] || || {{{+1 ANTONIUS GAUDI}}} [br] {{{+1 CORNET}}} [br] REUSENSIS [br] ANNOS NATUS LXXIV [br] VITAE EXEMPLARIS VIR [br] EXIMIUSQUE ARTIFEX [br] MIRABILIS OPERIS HUJUS [br] TEMPLI AUCTOR [br] PIE OBIIT BARCINONE [br] DIE X JUNII MCMXXVI [br] HINC CINERES TANTI HOMINIS [br] RESURRECTIONEM MORTUORUM [br] EXPECTANT || || {{{+1 안토니우스 가우디}}}[br]{{{+1 코르네트}}}[br]레우스 출신[br]향년 74세[br] 모범적인 삶을[br]살아온 사람으로[br]위대한 예술가이며[br]경이로운 이 교회의[br]건축가[br]1926년 6월 10일[br]바르셀로나에서 세상을 떠나다[br]이 위대한 인간의[br]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br]기대하노라 || 세상을 떠나고 불과 10년이 지난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성가정 대성당의 지하묘지가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방화되었고 가우디의 무덤도 훼손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우디의 제자로 일한 적이 있는 만화가 [[https://en.m.wikipedia.org/wiki/Ricard_Opisso|리카르드 오피소]](Ricard Opisso, 1880~1966)가 간신히 막았다. 하지만 오피소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의해 무덤 안에 공화파의 무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파헤쳐지고 만다. 그나마 관뚜껑까지 뜯겨나가는 참극은 면했지만 무덤은 파헤쳐진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대가 [[1939년]] 바르셀로나를 점령한 후에야 비로소 무덤을 다시 봉인할 수 있었다. ||[[파일:external/www.travelgeekery.com/Sagrada-Familia-Passion-Facade-1200x801.jpg|width=100%]] || || 수난의 파사드에 설치된 조각상 || 2000년대 초엽에는 그를 [[복자]]로 [[시복]]할 것을 건의하는 운동이 있기도 하였다. 성가정 대성당의 수난의 파사드 부분을 맡은 조제프 마리아 수비락스 이 시자르(Josep Maria Subirachs i Sitjar, [[1927년]] [[3월 11일]] ~ [[2014년]] [[4월 7일]])는 이미 가우디를 [[성인(기독교)|성인]]으로 간주하여, [[성상(조형물)|성상]] 사이에 가우디의 옆모습을 본따 끼워 넣어 두었다. 하지만 당시 가우디의 친구들은 고인이 보면 비웃을 일이라면서 이런 걸 불쾌하게 여겼고, 후손들도 반기지 않고 있다. 일단 시복시성 청원은 교황청에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판정해서 심사 절차를 개시했지만, 복자 내지 성인으로 인정받는 데 필요한 기적 등의 조건을 충족시킬 근거, 사례가 없다보니 실질적인 진전은 없는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